2018년 2월 25일 일요일

Pablo Picasso - His real name ( 파블로피카소의 진짜 이름 )

우리가 알고있는 "큐비즘"의 대가 피카소. 정말 그의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거 맞나요?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크리스핀 크리스피니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마르티르 파트리시오 클리토 루이스 이 피카소 (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ia de los Remedios crispin Crispin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Martyr Patricio Clito Ruiz y Picasso )"가 그의 이름 입니다. 
1881년 10월25일 "스페인의 말라가" 에서 출생하여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무쟁"에서 생을 마감할 때 까지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작가 입니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정작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다작으로 유명한 그는 13,500여점의 그림과 700여점의 조각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특징들을 가지게 됩니다. "청색의 시대" 를 거쳐 "분홍의 시대" ,"신 고전파 시대" 로 이어지는 동안 미술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어 나갔습니다. 늘 발견하고 연구하고 학습하며,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속에 대작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의 대표작인 "게르니카" 나 "한국의 학살" ,"아비뇽의 처녀들"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뒤로하고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자화상" 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Age 14 , 18
14세와 18세의 그린 피카소의 " Self-Portraits" 입니다. 이시기에 그의 집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부친이 교편을 잡던 학교에서 미술을 배웟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미술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여러 미술 상을 휩쓸게 됩니다. 15세에 마드리드에 나와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프라도 미술관에 매일 다니다 시피 하며 명화를 감상하던 기시였습니다.

이무렵 특히 "그레코( 엘 그레코- 1500년대 스페인 화가 ) "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점차로 부친과 관학파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의 "몽마르트"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삼아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 이끌려 드디어 그와 길고 긴 질긴 인연을 이어갈 "파리" 땅을 밟게 됩니다.

Age 20
1901년 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양친이 있는 바로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아,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노인,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 하였 습니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하지않고 대상과의 충분한 공감을 통해 그림을 그려 나갔죠. 이 시기는 짙은 블루 단색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입니다.

화면의 형체는 야위었고 선은 병적일 만큼 섬세 합니다.색체는 어둡고 안타까우며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눈물에 흥건히 젖은 예술 , 촉촉한 계곡의 푸르름"이라 묘사한 이른바 "청색의 시대" 입니다. "애정" , "늙은 유대인" , "다림질 하는 여인" 등의 유명한 작품을 그리던 시기 입니다.

이 시기에 그의 자화상은 굳게 다문 입술에 슬픔을 머금고 누군가를 바라 보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눈에는 고독이 스며들어 푸르른 낯빛이 더욱더 야위어 보입니다. 청색의 시대에 그의 20세 또한 짙은 "블루"에 젖어 있는듯 합니다.

Age 24 , 25
이 시대를 이어 짧은 기간인 "분홍색의 시대"(1904∼1906)가 계속됩니다. 화면은 밝은 연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겨우 물 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와서 화면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당시에 피카소는 시인 "막스 자콥"이 이름 붙혀준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뿐만 아니라 연인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내면에서 외면으로 시야를 넓혀 나갔던 시기 입니다.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유명한 동판화 "살탐방크" (16점, 1913년 출판)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 동판화는 유채와 같이 방금이라도 형체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Age 35
피카소는 "큐비즘"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도 때때로 생생한 수법으로 돌아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큐비즘에 사실상의 종지부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뚜렸해 지기 시작 합니다. 특히 1917년 피카소에게 한 전기가 닥쳐오게 됩니다. 이 해에 "장 콕토"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의 공동작업을 권유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습니다.

같은 해에 일단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폼페이,피렌체 등지를 돌며 고대와 르네상스의 미술행각을 한 후, 1920년 드디어 "신고전주의" 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을 택하게 됩니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 합니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시리즈가 이 시기의 대표 작품 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의 음악가"와 같은 모순된 수법의 대작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다시 화면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관여 하게 됩니다.  또한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보"와 "발자크" 의 "알려지지 않는 걸작" 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에 의한 삽화를 그게 됩니다. 35세의 자화상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Age 56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를 그립니다. 이 묘화는 언제부터 인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환상이 되어 이듬해에 아름다운 동판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무방비한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립니다.

이것이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에스파냐관을 장식한 유명한 "게르니카" 입니다. 큐비즘 이래에 오로지 예술의 범위 내에서만 행하여진 듯이 보인 규문의 자세를 뒤로하고 "게르니카" 를 그림으로서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침략자를 규탄한 것 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하였습니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습니다. 또 1950년대부터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며 이것을 자기 양식화 한 독특한 모작 으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습니다

Age 83 , 86 , 90 , 90-1
이후 그의 노년작들은 기존에 가졌던 시대적 변화에 역행하거나 "큐비즘"이후에 그의 화풍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제 조합을 보여주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천재는 단명한다는 고정관념에 항의하듯 그는 그의 긴 이름 만큼이나 긴 생을 살며 미술계에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긴 이름을 가지면 장수 한다는 고전 코메디가 생각 납니다. 김 수한무 거북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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